잡동사니 블로그
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 02 본문
토베 카케루라는 남자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자.
물론 유키노시타가 했던 평을 그대로 가져다 쓰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 ‘무능한 주제에 입만 산 촐랑이’ 물론 유키노시타는 토베라는 남자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지만, 그게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없다. 어차피 인간은 타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까. 피상적인 이미지, 겉으로 드러나는 페르소나. 딱 그 정도면 필요한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어떠한 평가도 정확하게 그 사람을 표현해낼 수 없음을 뜻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유키노시타의 평은 잠시 접어 두고 내 느낌을 말하겠다.
수학여행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내가 봐 온 토베 카케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미우라 유미코는, 에비나 히나는, 하야마 하야토는, 모두들 변화를 두려워했다. 그 셋은 지금과 같이 F반의 최상위 카스트 일곱 명이 빚어내는 인간관계를 넘어선 무언가가, 그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원했던 것이다.
부서지지 않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관계를.
추구했던 것이다.
별과 같이 변하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을
나 역시 그 심정에 공감했다. 마음을 전하는 것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 진정으로 옳다는 보장은 없다. 한 때 나에게 친절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관계가 모조리 파괴된다. 그 후로 남는 것은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타인의 가열찬 멸시와 비난 뿐. 그러한 리스크를 모두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영혼에 대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비겁하다고 질책하지도 않았고, 겁쟁이라고 비웃을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토베의 고백을 가로챘던 것이다. 그 셋의 염원 속에서, 어쩌면 과거의 내 자신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좀 더 다른 미래를 이끌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결국 모두 의미가 없는 행위였음을 안다.
그러니 나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에비나의 숨겨진 일면을 어렴풋이 느끼고 에비나를 향하게 된 토베의 연정을.
그 후 자신의 의뢰를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인 나를 용서한 토베의 행동을.
하야마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그를 극복하려 했던 토베의 의지를.
그들 중 유일하게 리스크를 감수할 용기를 지녔던 토베의 기백을.
하야마 하야토보다도 더 강력한 청춘의 화신인 토베 카케루를.
그 모든 것을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린 나만큼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역시 내 청춘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
2화
“조용히 해라. 교장선생님 전달 사항 있으니까.”
선생님은 들고 있는 프린터 더미로 교탁을 몇 번 내리쳤다. 교장에게 시달린 건지 히라츠카 선생님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잡담을 나누던 학생들이 입을 다물고 자신에게 주목하자 선생님은 프린터를 펼쳤다.
“최근 야간에 알바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 종종 발견된다고 한다. 적발 시 정학처분을 내리시겠다고 하니 모두들 주의하도록. 정학 처분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속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즉시 와서 상담하도록 해라. 내 나름대로 도움을 주도록 하겠다.”
나도 모르게 카와사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와사키는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턱을 괸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거기서 알바는 안 하는 건가. 어떻게든 다 해결을 해 낸 모양이군.
“그리고 문화제 때부터 말이지, 옥상에 자주들 올라가는 것 같은데 위험하니까 자물쇠 달아놓은 거다. 올라가지 말도록. 이상.”
그렇게 말하며 히라츠카 선생님은 나를 째려봤다. 저번에 하야마랑 같이 갔던 걸 벌써 들킨 건가. 자동으로 주위의 시선을 모으고 다니는 하야마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겠지. 역시 가까이 있어서 좋을 일이 없다니까.
그걸로 전달사항은 끝이었다. 이걸로 겨울의 학교생활을 하루 더 처치하는 데 성공했군. 히라츠카 선생님이 나가고 나서 짐을 챙기고 있는데 갑자기 토베가 다가왔다.
토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쪽을 주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히키타니. 잠깐 얘기 좀 해도 되냐?”
하야마와는 다른 태도라 크게 거부감이 일지는 않았다. 의아하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토베는 묘하게 초조한 기색으로 내가 가방을 챙기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해서 봤더니 토베는 이미 나갈 준비가 만전인 상태였다. 이 녀석, 언제부터 유키노시타 정도의 속도를 손에 넣은 거지? 그와 더불어 의문이 일었다. 꽤나 진지한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인데.
교실 밖으로 나오자 토베가 바로 옆으로 따라 붙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인적이 드문 특별관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당겨 토베의 손에서 어깨를 빼낸 후 그를 돌아보았다. 지나치게 진지한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뭐 좀 물어보자.”
“뭔데?”
“히키타니. 너……어제 에비나랑 데이트 했냐? 진짜야?”
깜짝이야. 이 녀석 에비나를 스토킹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토베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어제 나와 에비나가 함께 있는 장면을 본 사람이 진짜로 있었다는 뜻이 된다. 맙소사, 그 말도 안 되는 핑계용 계략이 반쯤 성공하다니. 세계 너무 쉬운 거 아니냐. 나한텐 어려우면서……. 그 사실이 좀 미묘해서 일단 잡아떼 보기로 했다.
“뭐? 누가 그래?”
“아니, 역 근처에서 너희들이 노는 걸 봤다는 애들이 쫌 있던데……에, 에비나가 그렇게 웃는 걸 처음 봤다고.”
에비나는 웃은 적이 없다. 가면이 안정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니 안심해야 할 대목인가. 여하튼 누군가에게 관찰 당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 되었다.
“데이트는 아니지만, 어제 같이 게임 센터에 가긴 했지.”
“진짜냐……. 어, 어떻게?”
토베의 표정에는 뭔가 필사적인 것이 있었다. 어떻게든 에비나와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다. 다만 그 방향성과 어제 있었던 나와 에비나의 만남은 전혀 다른 것이었으므로 그 사실을 지적해 주기로 했다.
“야, 토베. 너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에비나가 나에게 호감을 품었다거나 그런 거 전혀 아니거든. 애초에 난 그렇게 거하게 차였고 말이야.”
“아, 미안.”
토베가 안쓰럽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차인 건 나지 토베가 아니니까. 별로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으므로 빠르게 결론을 말했다.
“그날 에비나가 너무 대놓고 차서 미안하다고 커피 한 잔 사주기로 한 거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그, 그런 거냐?”
토베가 눈에 띄게 안심했다. 설마 에비나와 내가 그 며칠 사이에 친해져서 서로 사랑에 빠졌다는 그런 스토리를 상상하고 있었던 거냐. 걱정할 이유가 없잖아. 짜증스러운 속내를 삼키고 있는 나에게 토베가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도 부럽다고……”
“대체 뭐가 부럽다는 거냐……에비나랑 사귀고 싶은 거잖아, 넌. 차인 내 처지가 부럽다고?”
“아니, 근데 에비나가 그렇게 사귈 생각 없다고 끊어버리기도 했고, 3학년 되서 다른 반이 되면 못 만날 수도 있잖아. 그러니 지금 고백하고 차이면 마지막에 데이트라도 한 번……”
우와아……이 녀석 왜 이리 찌질해졌지. 나는 경이감에 젖어 토베를 바라보았다. 나름대로 리얼충 아니었냐고 너. 지금 토베의 전투력은 급감해 있다. 혹시 참백도 어디다 잃어버렸냐? 이대로라면 두 권이 지나기 전에 죽을 거라고.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토베는 그걸 무언의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자기 혼자서 결론을 지었다. 수학여행 때 그토록 애타게 변화를 거부했던 세 명이 들었다간 난리가 날 결론을.
“그래……에비나에게 다시 고백해야겠어! 너에게 뒤쳐진 채로 있을 수는 없지! 데이트라도!”
……누가 좀 말려라, 망할.
나로선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폭탄을 다른 녀석들한테 떠넘기기로 결심했다. 부장인 유키노시타도 말했잖아. 활동하지 말라고. 그래,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다. 딱히 내가 귀찮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 여기 거기잖아? 그 뭐냐……너희들이 부활동 한다고 했던…….”
“그래.”
토베는 몇 번 와본 봉사부 부실을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점점 이 녀석과 대화를 하는 게 피곤해진다. 가급적 빨리 다른 사람에게 돌려버려야겠다. 나는 부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롤러가 드르륵하며 기분 좋게 구르는 소리를 냈다.
“아, 힛키 왔네? 어라, 토벳치까지?”
유이가하마가 나에게 손을 흔들다가 내 뒤를 따라 들어온 토베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키노시타나 미우라, 에비나 역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토베가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옆으로 비켰다. 토베는 헐렁한 자세로 부실 내로 들어오다가 안에 있는 에비나의 모습을 보고서는 슬그머니 허리를 폈다.
“여, 여어. 다들 무슨 일이야? 유키노시타에게 뭐 부탁할 거라도 있었던 거야?”
“토벳치는 무슨 일로?”
“나는 히키타니가 데려와서 왔는데…….”
토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뒤통수를 긁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부실 안에 있던 여자애들의 시선 역시 자연스레 나에게 모였다. 부장, 유키노시타는 차가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히키가야? 무슨 일인지 설명을 부탁할 수 있을까.”
“아니, 토베는 AS를 원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부장이 활동 정지 명령을 내렸으니까. 독단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너희들에게 맡기기 위해 데려왔을 뿐이라고, 부장님.”
“AS…….”
암 슬레이브가 아닙니다. 람다 드라이버는 없으니 주의해 주십시오. 유키노시타는 내 말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앉으렴.”
유키노시타는 그렇게 말하며 포트 옆에 놔둔 종이컵 더미에서 컵을 두 개 꺼냈다. 자세히 보니 이미 이 여자들은 쿠키까지 펼쳐놓고 홍차와 함께 우아한 티타임을 벌이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비현실적인 광경이라면 마리아님도 꼭 보고 계시겠지……. 물론 미우라와 유키노시타가 사이좋은 모습은 쉽사리 상상하기 힘들지만.
토베는 나를 따라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자를 거꾸로 돌린 채 등받이에 팔을 기댄 토베는 묘한 눈초리로 자신에게 홍차를 따라주는 유키노시타를 바라보았다.
“어……혹시 친목회?”
“아니야.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음대로 넘겨짚지 말아 주겠니?”
싸늘한 유키노시타의 반응에 토베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제아무리 리얼충이라 해 봐야 유키노시타의 압력을 버텨내긴 힘들다. 유키노시타는 전능한 초인이니까. 그래서……아니, 됐다. 나는 뻗어나가려 하는 사고의 흐름을 차단했다. 유이가하마가 웃으며 토베에게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최근 우리 반 분위기가 안 좋잖아. 그것 때문에 같이 상담하러 온 거야.”
“오, 오? 유미코가?”
“그래. 내가 그런 거에 뭐 불만 있어?”
“아니, 완전 쩐다고! 이야, 역시 유미코!”
토베는 과장스럽게 호들갑을 떨며 미우라를 칭찬했다. 미우라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다지 싫지는 않은가보군. 토베가 알게 되면 하야마에게도 흘러 들어갈 거라는 희망이라도 품고 있는 걸까. 뭐, 가능성이야 충분하겠지.
“그런 이유로 현재 처리하고 있는 의뢰가 있어. 다시 네 의뢰를 도와줄 여건이 되지 않네.”
“아, 아니. 난 그러려고 온 게 아니라니까. 그냥 히키타니 따라온 거라고~.”
토베는 팔을 내저으며 AS라는 목적을 급히 부정했다. 혹시나 유키노시타나 내가 토베의 의뢰에 대한 것을 입 밖으로 내놓을까 싶어 초조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에비나가 여기에 있으니까. 아무리 토베가 관계를 잃을 리스크를 각오한 상태라 해도,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대답이 돌아오고 모든 것이 파탄나는 전개를 환영할 리는 없겠지. 뭐, 에비나나 미우라나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나도, 그리고 유키노시타도. 그런 전개를 증오하는 쪽에 가깝다. 토베의 걱정은 기우일 뿐이다.
“그나저나 우리 반 분위기라~. 역시 쫌 그렇지?”
토베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쩌라고, 임마. 내가 여기서 F반 애들이 날 까대서 너무 괴로워 자살할거야! 같은 말로 동의라도 표하길 원하는 건가. 하지만 유이가하마는 반색하며 그런 토베의 태도를 반겼다.
“그래! 이왕 온 거 토벳치두 도와주라! 그럼 훨씬 나을 거야!”
“오오, 좋았어! 내게 맡기라고!”
한 대 때려도 됩니까? 아, 물론 안 되겠죠. 그렇게 말하면서 에비나의 반응을 힐긋힐긋 살피는 것이 착하고 대범한 자신을 인정해 달라는 오라가 너무 흘러나오는 모양새라 골치가 아프다. 지금 상황에서 토베가 에비나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해서 뇌에 구멍이 뚫렸거나 두개골에 눈 부분 구멍이 막혔거나 하지 않는 이상 모를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그럼 같이 노력해 보자고!”
노력이라. 나는 비웃음을 삼킨 채 과장되게 몸을 떨어대고 있는 토베를 바라보았다.
뭐, 어차피 에비나의 눈에 들기 위해 하는 일이니 그게 진짜일 리는 없지만.
진짜라고 해서 뭐가 바뀌는 것은 없다. 어차피 노력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노력하라는 말은, 힘을 내라는 말은 현실에 대한 개성적인 형태의 도피일 뿐이다. 남들이 잘 비난하지 않는.
모든 도전과 시도에는 리스크가 존재한다. 하지만 무작정 노력하라는 말은 그 리스크를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고찰을 모조리 내팽개친 후에 그저 기계적으로 도전을 찬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어색하게 덧붙인다. 시도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단언컨대 그런 건 없다. 결과가 실패라면 과정조차 평가받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들은 자신이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겠지. 슬프지만 그런 것이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그게 불편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쉽사리 상황에 있는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전가한다. 상냥한 얼굴로, 세상의 지혜를 건네주는 것 마냥 패배자를 기만한다.
세상이 불합리한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쪽은 바꾸기가 힘들단다. 그러니 뭔가를 바꾸려면 네가 노력을 해야 해. 결국 지금 네가 실패한 건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거야. 노력하려무나. 그리고 다시 도전하려무나. 뭐, 망해도 내가 책임지지는 않을 거지만.
도무지 웃을 수가 없는 논리다. 폭력을 휘두르는 당사자가 피해자를 바닥에 처박고, 그 위에 올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내뱉는 경멸의 말을 증오한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나의 동류, 자이모쿠자를 보라.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이모쿠자를 보기만 해도 기피한다. 소부 고등학교라는 사회의 축소판에서 예외는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자이모쿠자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겠지. 하지만 상관은 없다. 그의 자기변호는 들어줄 가치가 없다고 이미 판결이 내려져 있으니까.
이 구조의 어디에 노력할 부분이 있다는 것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자이모쿠자가 중2병 행위를 그만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나? 천만의 말씀이다. 한 번 하위로 낙인찍힌 카스트는 변하지 않고, 한 번 쓰레기라 경멸받기 시작하면 인간이 될 수 없다. 노력하고 싶다 한들 점진적인 변화의 기회를 받지 못한다. 이 낙인은 속죄를 허락받지 못하는 죄다.
물론 그런 외톨이들에게도 말할지 모른다. 사교성을 닦고, 활동적으로 나서면 괜찮아 질 거라고. 가끔 그렇게 변신에 성공한 예를 들면서. 하지만 인간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은, 환골탈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누군가 할 수 있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이미 인류는 학명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서 호모 지저스 붓다 차라투스트라로 바꾸고 신이 되었겠지. 아쉽게도 인류는 아직 인간이었다.
그들의 머리는 그럴 수 있는 재능과 자질이 있었다면 외톨이가 되지 않았을 거란 단순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결국 그건 바닥에 처박혀 있는 외톨이들을 비웃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아프리카의 난민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하며 돈을 벌어서 먹을 걸 사면 된다고, 일을 해서 돈을 벌라고 말하는 것은 격려인가 폭력인가.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 경험이,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믿는 도덕이, 자신이 틀리지 않았을 거라 믿는 정의가,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상식이라는 존재가.
모두 진절머리가 난다.
토베가 대답 없는 나를 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한숨을 뱉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래, 뭐.”
내 동의가 마지막이었는지 토베는 씨익 웃으며 가볍게 내 등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키노시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인원이 한 명 늘어났구나.”
유키노시타의 어조는 미묘하게 인원이 한 명 늘어나고 말았다며 탄식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 착각인가. 유키노시타는 부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 둘러보며 선언했다.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서 설명할게. 저번에 확인한 거지만, 특정 반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처리하기엔 방과 후 활동만으로는 문제가 있어. 그러니 앞으로 이 멤버가 모이는 시간을 바꿨으면 해.”
“시간을? 언제루?”
“점심시간. 각자 식사를 마치고 나서 한 번쯤 상황을 전해 들었으면 하는데.”
유키노시타의 제안에 미우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반발하고 나섰다. 말이 점심 시간이지, 그 시간은 리얼충들에게 있어 중요한 사교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간을 독서 아니면 잠으로 때우는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하아? 대체 왜 점심시간에 네 얼굴을 봐야 하는 건데?”
“네 이상한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하진 않았어. 남의 말을 곡해하지 말아 주겠니?”
“뭐?”
유키노시타 역시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차가운 대꾸에 유키노시타와 미우라 사이가 또 험악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이에 있는 완충제 유이가하마 선생이 나섰다.
“유, 유미코! 그냥 시간을 옮기자는 거니까! 그러면 이제 방과 후에는 안 와두 되는 거잖아?”
갈색 당고 머리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는 유이가하마는 상대방에게 압력을 가하는 분위기는 없지만 상대방의 압력 역시 무효화하는 꽤나 특이한 경향을 지니고 있다. 올해 여러 사건을 겪으며 원숙해진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교실에서는 미우라를 부실에서는 유키노시타를 상대하며 얻어낸 경험치라고 해야 할까…….
유이가하마에게 존경과 경의를 담아 이매진 브레이커라는 호칭을 수여했다. 유이가하마의 두뇌 능력은 LEVEL 0에 가까울 테니 고증도 철저하다고 생각한다. 여튼 그런 유이가하마의 중재에 미우라와 유키노시타의 칼날같은 분위기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책임지기 싫다면 오지 않아도 좋아.”
“……좋아.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건 반대야. F반이나 J반이나 너무 멀잖아? 그냥 가까운 데서 얘기만 전해주면 되는 거 아니야?”
“그, 그럼 중간에 복도에서…….”
“으음……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장소는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소문이 더 이상하게 날 지도 모르니까.”
여태껏 아무런 말도 없던 에비나가 나를 슬쩍 바라보며 유이가하마의 의견을 반대했다, 다들 그 시선을 따라서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에비나의 말에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보세요들…….
“히, 힛키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게, 그냥 다른 사람들이 더 오해하면 안 되는 거니까!”
유이가하마가 서둘러 나를 향해 변명을 했다. 아니, 뭐.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저 그룹에 내가 끼어 들어가 있는 상태를 보이는 것 자체가 나에게 별로 이로울 일은 없지. 쓸데없는 관심을 받는 것은 이쪽도 사양이다.
“그럼 옥상에서 보면 되잖아? 추우니까 거기서 놀고 있는 애들도 없을 거고. 잠깐만 만나서 이야기만 할 거라면 거기면 충분하지.”
“옥상? 거긴 위험해서 자물쇠로 잠겨 있는 거 아니었니?”
유키노시타의 순진한 반응에 순간 미우라가 코웃음을 쳤다.
“거기 자물쇠는 고장난 지 오래야. 그냥 손으로 잡아당기기만 해도 열리거든.”
“그렇다 해도 옥상이 위험하다는 건 변하지 않아. 장소로는 적당하지 않구나. 다른 데를 생각해 보렴.”
유키노시타는 잠시라도 미우라에게 밀렸던 것이 분한 듯 울컥하며 쏘아붙였다. 유키노시타 씨, 승부욕 너무 넘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미우라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유키노시타에게 있어 유효한 방법을 깨닫고 만 눈치였다.
“흐응, 너, 도망치는 거야?”
“누가 도망친다고?”
“아니야? 사람 없고, 두 교실에서 적당히 가까운 장소를 분명하게 골라냈잖아. 아니면 네가 말해 보던가?”
순간 부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내 옆에 있던 토베는 소름이 돋았는지 팔을 연신 쓰다듬고 있었다. 그 마음은 이해한다. 유키노시타가 전력으로 감정을 드러내면 버티기가 참 어렵지. 유키노시타는 차가운 시선으로 미우라를 마주 본 채로 선언했다.
“네 말을 받아들여 주도록 하겠어. 점심시간이 그렇게 긴 것도 아니니까, 잠깐 동안이라면 괜찮겠지. 매일 늦지 않고 나오도록 해.”
아니, 근데 내 의견은 듣지도 않는 거냐.
나는 천천히 빵을 씹었다.
한 번 넘길 때까지 열 번을 씹는다. 두 번 넘기면 우유를 한 모금. 나는 다분히 기계적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테니스 코트가 보이는 여기는 겨울의 바닷바람이 들이치는 곳이라 빵이고 우유고 금방 차가워져서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춥기 때문에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
서두를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빵 하나, 우유 한 팩이라는 남자 고등학생답지 않은 간소한 식사를 끝내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추위에 얼어붙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지만 옥상으로 가야 한다. 걸음을 옮기며 이 같은 제안을 했던 유키노시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언제나 성실하고 부지런한 건 분명히 장점이겠지만……. 결국 이 모든 행동이 사태의 해결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뭘 기대하고 있던 걸까.
점심시간에 그렇게 모이기로 한 이후에, 토베는 나를 같이 점심 먹는 그룹에 끌어들이려고 했다. 같이 먹다가 같이 가면 편하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그 그룹이라면 미우라 그룹과 하야마 그룹이 합쳐진 F 반 최강의 G7 같은 존재……. 거기에 인간실격의 히키타니가 껴 있으면 어떻게 되겠냐. 애초에 뭣하러 옥상에서 모이게 됐는지 생각을 좀 해줬으면 한다만.
그 뒤로 며칠간 나는 도망치듯 여기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다. 내가 추위를 즐기기 때문은 아니다. 더운 것도 추운 것도 싫다. 인간관계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자 어느새 옥상 문 앞이었다. 보니 이미 자물쇠는 열린 채로 옆에 걸려 있다. 나는 문고리를 붙잡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고, 시퍼런 하늘을 배경으로 바로 앞에 화가 난 듯한 유키노시타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시 문을 닫았다.
깜짝이야. 유키노시타가 나에게 얼음계열 공격마법을 쓴 줄 알았잖아. 어쩐지 춥더라고.
“……히키가야. 문을 열어.”
무서워! 목소리가 너무 무섭다고! 나는 공포에 질린 채로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다시 차가운 바람과 함께 유키노시타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내 얼굴을 보고 문을 다시 닫은 건지 설명을 들어보도록 할까?”
“그……공격 마법에 대한 대책으로…….”
“……나중에 늦은 것과 함께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니 기대하도록 해, 히키가야.”
유키노시타의 처벌에 대한 공포로 몸을 떨며 -추위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옥상으로 나가니 이미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하긴 뭐, 천천히 매점으로 가서 천천히 빵을 산 후 천천히 운동장에서 먹고 오는 나보다 느릴 이유가 없겠지. 털실로 짠 머플러를 두른 채 팔짱을 끼고 있던 미우라가 나를 보며 화를 냈다.
“히키오! 너무 늦어! 춥단 말이야!”
진짜냐? 히키오가 잘못했네. 뭐, 난 히키오가 아니니까 대충 무시하기로 했다. 자리나 잡을까.
유키노시타는 가운데쯤에 서 있는 유이가하마와 미우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뭐, 언제나 실질적으로 대화를 하고 티격태격하며 정보를 나누는 건 유키노시타랑 미우라였으니 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나 할까. 유이가하마는 그 사이에서 최대한 싸움이 나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다.
에비나는 그 뒤에서 펜스에 몸을 기댄 채 가벼운 미소를 띠며 세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에비나가 생각하던 해결책은 이미 내가 거절해 버렸으니까. 에비나는 자신을 보고 있는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잠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당황해하며 고개를 피했다. 그 웃는 모습에서 금이 간 유리처럼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나는 에비나와 정 반대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멀리. 에비나가 나에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이 정도면 됐으려나? 나는 오랫동안 숙달시켜 온 거리 재기 능력을 발동시켰다. 보다 안전해지기 위해 한 걸음을 더 물러났다. 안정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와 에비나라고 해 봐야 이 정도 사이인 거겠지.
“그럼 모두가 모였으니 오늘의 상황을 논의해 볼까.”
“움……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아, 2교시 끝났을 때 쯤에…….”
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세 여자의 대화를 멍하니 듣고 있을 때, 미우라 뒤에서 맞장구를 쳐 주던 인간 맞장구 발생기 FG204 2nd edition ver 2.31 코드네임 토베가 나에게 다가왔다. 리얼충 전용 장비이므로 나와는 관계가 없는데. 내 의아해하는 시선도 무시하고 토베는 내 옆에 섰다.
“히키타니.”
“왜?”
“야, 나 진짜 죽겠다고……팁 좀 주라. 응?”
그리고서는 입을 열자마자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하치에몽이 아니니까 그런 걸 달라고 해 봤자 줄 수 없다고. 나는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반문했다.
“무슨 팁?”
“에비나랑 친해질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진짜 요새 토베의 머리에는 놀랄 정도로 에비나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조금 놀랍다. 이미 거절당한 사실을 에둘러 알고 있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니. 토베는 우울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잘 모르겠거든. 하야토는 처음부터 좀 부정적인 것 같아서 손 놓은 것 같고, 다른 두 녀석은 진지하지도 않다고. 믿을 건 히키타니 너 뿐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아니, 그래도 말이지. 너 은근 에비나랑 말이 통한달까……그런 게 있잖어? 뭔가 좀 특별한 분위기랄까 말투랄까?”
토베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하야토처럼 뭐든지 잘하는 것도 아니고……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 난 평범하니까 말이야…….”
토베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 안에 들어있는 감정에 공감해 버릴 것만 같다.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게 그렇다.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목표에, 자신의 이상에 미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절망한다. 생각대로 되는 것이 없는 현실을 혐오한다. 그러고도 바뀌지 못하는 자신을 증오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포기하고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평범이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결국 평범은 패배라는 말과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그런 평범함을 가지게 될 바에야 당당하게 외톨이가 되려 했다.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기만과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청춘과는 거리가 있는 몸이라고. 나는 나의 찌질함에 긍지를 품었고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건 결국 다른 형태의 열등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고,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발악 속에는 결국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비탄과 체념, 그리고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이 담겨 있다. 패배와 무엇 하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평범하다고 자학하는 것도 패배, 평범하지 않다고 도피하는 것도 패배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패배가 아닌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난 정말 진지하다고…….”
그 말에 거짓은 없겠지. 패배에 지쳐 모든 걸 포기해버린 나와는 다르게 토베는 아직도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토베의 태도가 찌질하다고 했던 건 취소해야겠군. 지금 토베의 전투력은 범상한 리얼충의 것이 아니다. 앗! 토베의 상태가……? 축하합니다, 토베 카케루는 리얼 리얼충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저 눈은 나와는 맞지 않는다. 하야마와 비슷한 눈이다. 거기에 훈련된 거부감을 품고 있는 나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만다. 나는 고개를 들어 토베의 시선을 피하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만 해도 말이야, 그 때 하야마를 만났을 때처럼 킹 엔진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낸다고.
그리고 내 시야에 에비나가 들어왔다.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정오를 넘어선 점심시간, 소부 고등학교 부근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바닷바람.
크게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에게 끈덕지게 말을 걸고 있던 토베와, 서로 다투고 있던 유키노시타와 미우라, 그 사이를 말리던 유이가하마는 보지 못했다. 오로지 토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들고 있던 나만이 보고 있었다.
그 때 하야마가 기대고 서 있던 자리, 지금 에비나가 기대고 있는 펜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는 광경을.
에비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된 듯 얼빠진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려 하고 있었다. 저런 자세로 여기서 떨어졌다간 머리부터 떨어질 게 확실하다. 그럼 죽는다. 나는 전력을 다해 발을 박찼다.
하아.
나는 내 나름대로 운동신경이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잘하는 축이 분명한 하야마와 미우라 콤비를 상대로 혼자서 테니스를 쳐내던 적도 있었고, 그 외에도 어느 정도 시간을 쏟아 노력만 한다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금방 오를 수 있었다. 감히 예측하건데 절대 평균보다 아래는 아닐 테지.
그 운동 신경으로 여태껏 뭘 해왔는가 하면 암울할 정도다. 뭘 하려고 해도 같이 해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나는 결국 흥미를 가졌던 스포츠는 모두 혼자서 즐기는 수밖에 없었다. 1인 테니스, 1인 농구, 1인 축구, 1인 야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1인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힘을 조절하는 능력이다. 나아가서는 거리를 재는 능력이다. 힘을 너무 과하게 주면 내가 다른 포지션으로 이동하기 전에 공이 거기를 벗어나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 속도와 그에 따른 이동 거리를 예측하고 거기에 힘을 조절하는 일을 해 왔다.
10년 가까이.
그래서 나는 분명 그 능력 하나에 한해서만큼은 또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량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것은 외톨이가 아니면 터득할 수 없는 능력이다. 물론 정말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은 몇 번 해보면 금방 터득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유키노시타 유키노를 보라. 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은 그 재능이 어떠한 분야의 것이든 어느 정도 초인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법이다. 이러한 자질이 부여하는 자존심과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라, 외로움에 지쳐 혼자서 구기를 하며 놀아야겠다는 생각에 잘 도달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쌓아올 수 있었던, 비참한 내 과거를 반영하는 거리 재기 능력이 달리고 있는 나에게 한 가지 정보를 전달해 왔다.
나와 에비나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다고.
한 걸음이 부족하다고.
에비나가 당황하며 무너지려 하는 펜스를 붙잡았다. 자그맣고 고운 손이 차가운 금속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붕괴하는 펜스에 몸을 맡겨 봐야 같이 무너질 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전력을 다해 에비나를 향해 달렸다. 아직까지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 세 여자 옆을 지나쳤다. 제길, 평소에 운동을 더 했어야 하나.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에 짜증이 난다.
나는 아직까지 옥상 끝에 붙어있는 펜스의 기둥 중 하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도약했다. 소라고둥을 양 귀에 댄 것처럼 거센 바람 소리가 귀를 울리고, 한 순간 중력을 벗어난 듯한 부유감이 몸을 엄습했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다.
기둥을 붙잡고 있지 않은 손을 뻗었다. 떨어지고 있는 에비나를 향해서. 새하얀 블라우스, 새까만 블레이저 재킷이 바람에 나부끼며 눈앞에 어른거렸다. 다행히 늦지 않게 닿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른손으로 에비나의 허리를 꼭 감싼 채로 붙들었다. 갑작스레 한 팔만으로 사람 하나의 무게를 버티려니 숨이 턱 막혀 왔다. 잠깐만, 잠깐만이면 되니까.
에비나의 숨소리가 들려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안경이 내 가슴에 부딪혔는지 잠깐 작은 신음성을 냈다. 나는 잡념을 지워내며 에비나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에비나가 나를 본능적으로 붙잡기 전에 끝내야만 한다.
두 사람의 체중을 견뎌내는 건 이미 반쯤 쓰러진 기둥에겐 무리였던 것 같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가 붙잡았던 기둥의 뿌리가 뽑히며 함께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절반 이상을 회전한 상태였다. 나는 신중하게 거리를 재며 에비나를 옥상을 향해 내던졌다.
어차피 그리 멀리 떨어져 있던 건 아니었으니까. 에비나는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싼 채 엉망진창으로 옥상 위를 굴렀다. 어디 부딪혔나. 큰 부상은 없겠지? 어, 지금 잠깐 스커트 아래로 속옷 보였다. 하늘색이네.
에비나가 무사한 건 확인했다. 이젠 중요한 건 내가 사는 거지. 나는 이미 무너진 기둥에서 손을 떼고 그 옆에 있는, 아직까지는 바깥을 향해 기울어져 있을 뿐인 펜스의 끝자락을 눈에 담았다.
손을 뻗어 저것만 붙잡으면 모두가 안전하게 게임 클리어다.
퍼펙트다.
……뭐.
손을 뻗지는 않을 거지만.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나는 어찌됐건 간에 살고 싶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게 쓸모없는 노력이라는 것을.
10년을 넘게 갈고 닦아온 내 거리 재기 능력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아까 에비나를 옥상에 집어던졌을 때, 당연한 말이지만 내 몸은 반대로 튕겨나갔다. 지금 상태에서 팔을 있는 힘껏 뻗어봤자 펜스까지는 한 걸음 정도의 거리가 남아 있다.
아까 내가 벌렸던 한 걸음이 거대한 방벽이 되어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77 센티미터의 거리를 줄일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보라고. 노력한다고 뭐가 이루어진단 말인가. 내가 밀짚모자 해적단의 선장이었다면 혹시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악마의 열매를 먹은 적이 없다. 결국 안 되는 일은 어차피 안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 지금 여기에 있는 77센티미터의 거리처럼.
문득 아까 옥상에 올라왔을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무언가 상처 입은 듯한, 금이 간 가면을 부여잡고 있던 에비나의 모습을. 그리고 그녀를 피해 한 걸음 밖으로 물러섰던 자신의 모습을.
만약 그 때, 에비나를 향해 한 걸음만이라도 가까이 다가갔더라면.
결과는 무언가 달라졌을까?
헛소리지. 미래가 가능성이고 현재가 선택지라면 과거는 불변한다. 냉정한 내 자신이 나에게 충고를 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쓸데없는 감상이라고. 이미 방법은 없다고. 그냥 포기하라고.
그래, 내 말이 맞았다.
나는 펜스를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나는 모든 것을 체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상 위를 바라보았다.
다들 얼빠진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특히 에비나는 더더욱 그랬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가가 충고를 해 주고 싶다. 언제라도 깨지지 않는 안정성을 지녀야만 가면은 비로소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하루노에게 한 수 배우는 게 좋겠어. 그녀는 와일드의 힘에 눈을 떠 페르소나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이젠 다 소용없지만.
나를 옥상 밖으로 밀어냈던 뉴턴이 전력을 다해 나를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까지 한없이 느려져 있는 것 같았던 시간의 흐름이 가속하기 시작한다. 상대성이론이 로맨틱하다니, 절대 동의할 수가 없는데요. 이래서 자연계는 좋아할 수가 없다. 언제나 용서가 없는 점이 나랑은 안 맞는다.
저 멀리, 푸른 하늘과 새하얀 콘크리트 건물이 뒤섞여 있는 풍경이 보였다. 2년 동안이나 내가 몸을 담아온 학교가 유달리 멀게 느껴졌다. 이유는 알고 있다. 멀어지고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처럼 모든 시야가 희미해졌다.
수명을 다한 형광등처럼 온 세상이 깜빡거렸다.
이윽고 격통이 전신을 덮친 순간.
……의식이, 사라졌다.
역시 내 청춘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
DEAD END
“히키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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