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팬픽, 웹소설 (18)
잡동사니 블로그
녹지 않은 눈이 고스란히 정원에 쌓여 있다. 루그니카에서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이래 손에 꼽을 정도다. 언제나 눈이 오는 날이면 자신도 모르게 이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게 되어버린다. 화려한 드레스의 옷자락은 미풍에 실린 눈송이를 그대로 맞는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깎아내고 다듬은 것처럼 매끄럽고 새하얀 손바닥 위에도 눈꽃이 하나둘 내려 앉는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손 하나 옷소매로 감싸지 않고 그 작은 손을 뻗은 채 가녀린 눈송이들을 받아내고 있다. "차가워..." 추위에 핏기가 가신 손의 미미한 온도에서도 손에 떨어진 눈은 금세 녹아버리고 만다. 무수한 물방울이 얼어붙어 만들어진, 불규칙하면서도 아름다운 눈송이는 어떤 마법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미의 결정체를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
해가 없는 방정식 거울에 비친 듯한 두 사람 좁혀지지 않는 77센티미터의 거리 교점이 존재하지 않는 끝없는 평행선 아무리 궁리해도 답을 낼 수 없는 문제 풀리지 않는 수학 시험지를 닮은 그 관계를 나는 어떻게 해도 웃으면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역시 내 청춘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 최종화 바람이 불지 않는 겨울의 운동장은 낮은 기온에도 불구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 녀석 앞에서 추위로 달달 떨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애써 표정을 지우며 하야마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토베에게 고백해보라고 옆에서 바람을 넣은 거, 너지?” “응, 맞아.” 시원스레 수긍하는군. 자신에게 약점이 되지 않으니 아무런 부담이 없다. 그러니 인정하..
하야마 하야토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할 것이 없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말하고 싶은 게 없다는 쪽이겠지. 내가 하야마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우월감과 열등감이 뒤섞인 복잡한 것이며, 나 자신조차도 정확하게 해석할 수가 없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떠들라고 해 봐야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하겠지. 내가 하야마라는 인간에 대해 우월감을 품었다는 사실이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야마는 그 누구도 상처 입는 걸 원하지 않는 겁쟁이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사슬은 반드시 선택을 강요하게 된다. A냐 B냐, 명확하게 구분되는 이분법적인 선택지. A와 B 모두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선택하면 나머지는 반드시 상처를 입는다. 하야마는 그렇게 할 수 없겠지. 그리고 하야마는 요 1년간 그 선택의 순간을..
이건 어디까지나 히라츠카 선생님에 대한 나의 혼잣말이다. 프라이빗한 생각이라고나 할까. 나이는 불명. 절대 알려주지 않으니까. 몸매는 발군. 쭉 뻗은 밸런스 정도야 보면 알지. 미모는 탁월. 가끔씩 이 사람이 30대(추정)라는 걸 잊을 정도. 격투는 최강. 몇 번 전설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저런 겉모습으로 결혼을 못한 걸 보면 분명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안쓰러운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본인조차도 자조 삼아서 그런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히라츠카 시즈카는 교직에 서서는 안 됐다. 학생은 언젠가 모두 졸업한다. 그리고 학교를 떠난다. 제아무리 친근함을 쌓아올린 관계라 할지라도, 졸업과 동시에 급격하게 옅어지기 시작한다. 교..
어떤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애는 세상과 단절된 듯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받은 인상은 그냥 그런 수준. 어디에나 있는 중2병 환자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서 사람들과 멀어지는 건 그리 드문 현상은 아니니까. 그 반대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 소년은 단절되어 있긴 했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진 않았다. 가끔씩 우리 반 모두의 행동을 조심스레 살피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마치 무언가 결과를 기다리는 연구자처럼. 그리고 어느 날을 계기로, 존재감 없는 관찰자였던 소년은 서서히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해 버렸다. 아마 그 소년은 전혀 원하지 않았을 테지만. 누구보다도 빛나는 다른 소년과 함께 우연히, 그냥 우연히 함께 움직이며 많은 ..
토베 카케루라는 남자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자. 물론 유키노시타가 했던 평을 그대로 가져다 쓰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 ‘무능한 주제에 입만 산 촐랑이’ 물론 유키노시타는 토베라는 남자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지만, 그게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없다. 어차피 인간은 타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까. 피상적인 이미지, 겉으로 드러나는 페르소나. 딱 그 정도면 필요한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어떠한 평가도 정확하게 그 사람을 표현해낼 수 없음을 뜻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유키노시타의 평은 잠시 접어 두고 내 느낌을 말하겠다. 수학여행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내가 봐 온 토베 카케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미우라 유미코는, 에비나 히나는, 하야마 하야..
유키노시타 유키노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유키노시타의 성적은 우수하다. 소부 고교 수석. 대부분의 학생이 대학 진학을 노리는 명문고, 개중에서도 J반의 다른 모두를 제치고 수석이라는 것은 그녀의 학습 능력을 간단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다. 운동 신경도 더할 나위 없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악의적인 서브를 가차 없이 되받아 쳐버리는 단호함, 모든 걸 너무 빨리 익혀버려서 체력만은 부족하다는 자기고백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의 뻔뻔함, 그건 자신의 운동 능력에 관한 확신에 가까운 신뢰가 없다면 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외모? 애초에 2년간 같은 반이었던 토츠카의 존재조차 몰랐던 내가 만난 적도 없는 그녀의 이름을 이미 듣고 있을 정도라면 설명은 충분하지 않을까. F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들만 모여 있는 ..

역시 잇시키 이로하의 청춘 러브 코미디는 끝나지 않는다. 잇시키 이로하 24세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이로하. 그녀는 완전히, 사축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청춘 러브 코미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원작자 : 札樹 寛人 -------------------------------------------- 이렇게, 잇시키 이로하는 생일을 맞이한다. 선배와 한잔한 다음 날, 밍기적거리며 침대에 나오자 이미 점심이 지날 무렵이였습니다. 어제 조금 과음을 한 것 같지만, 다행히 어제는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고 생각되네요. 아니, 오히려 파인 플레이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어제의 나, 나이스! 파이팅! 그렇다고요, 저는 취한 김에 라고 하지만 선배와의 데이트 약속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니까요. 시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