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블로그
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 01 본문
유키노시타 유키노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유키노시타의 성적은 우수하다. 소부 고교 수석. 대부분의 학생이 대학 진학을 노리는 명문고, 개중에서도 J반의 다른 모두를 제치고 수석이라는 것은 그녀의 학습 능력을 간단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다.
운동 신경도 더할 나위 없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악의적인 서브를 가차 없이 되받아 쳐버리는 단호함, 모든 걸 너무 빨리 익혀버려서 체력만은 부족하다는 자기고백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의 뻔뻔함, 그건 자신의 운동 능력에 관한 확신에 가까운 신뢰가 없다면 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외모? 애초에 2년간 같은 반이었던 토츠카의 존재조차 몰랐던 내가 만난 적도 없는 그녀의 이름을 이미 듣고 있을 정도라면 설명은 충분하지 않을까. F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들만 모여 있는 미우라 그룹을 혼자서 압도할 정도의 아름다움이다.
업무 처리 능력도 뛰어나다. 문화제 간 그녀가 보여준 파워는 문화제 실행 위원들 모두를 감탄하게 했을 정도였다. 명실 공히 위원회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유키노시타 자매였다. 나머진 모두 들러리였을 뿐.
사람을 싫어하고 어려워하지만 무서워하진 않는다. 적이라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배제한다. 라이트노벨에서나 나올 것 같은 전사의 혼을 가졌다고나 할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움츠러드는 일 없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유키노시타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삶 속에서 처음으로 만난, 나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단독행동 S 클래스. 홀로 전능에 가깝다면 관계는 불필요하다. 그렇게 혼자서 선 채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향해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는, 비굴해지지 않아도 되는 그 강함을 동경했었다.
지난 1년을 돌이켜 본다. 나는 어땠지? 도무지 나답지 않았다. 아무리 히라츠카 선생님이 강요한다 한들, 내가 정말로 거부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반쯤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뢰를 해결……아니, 해치워 왔다.
왜 그랬던 걸까.
그런 의문을 품으며, 뻔히 보이는 대답을 회피해 왔다. 하지만 이젠 한계였다.
문화제가 지나고, 수학여행이 지나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여전히 유키노시타를 동경한다.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오롯이 서 있는 그녀를.
그렇기 때문에 그 강함이 더렵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외톨이라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그 가능성이 부서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전능함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 왔다. 그래서 봉사부의 의뢰를 계속해서 해소했다. 주변에서 아무리 질렸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도, 전교생이 나를 혐오하게 된다고 해도, 그 끝에 있는 것이 불완전한 마무리뿐이라고 해도.
설령, 그 결과 내가 설 곳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역시 내 청춘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
1화
수업이 끝난 교실은 충분히 번잡스러웠다.
수학여행도 끝나고 나니 정말로 한 해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다. 봉사부에서 조금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면 금방 해가 저무는 걸 쉽사리 확인할 수 있겠지. 물론 지금은 봉사부 활동이 없지만. 부장이신 유키노시타 님은 당분간 체계적인 부활동 방법을 만들어야겠다며 부활 휴가를 선언했다. 바로 어제까지.
평소라면 그런 결정은 환영이었겠지. 대환영이다. 평생 쉬어도 될 정도다. 부장인 유키노시타의 결정이라면 히라츠카 선생님이 뭐라고 참견하지도 않을 거고. 그거야말로 완벽하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뭐, 어차피 오늘부터 부활동은 다시 재개했다.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한숨을 내쉬며 다음 수업에 쓸 교재를 펼쳐놓고 들여다보고 있는데 유독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그 사이에 들어있던 히키타니라는 말이 참 크게 들렸다. 외톨이는 자기 이름을 캐치하는 능력이 뛰어나니까, 좀 잘 숨겨달라고.
화제야 뭐 들어볼 필요도 없다. 고백 얘기겠지. 실패로 끝날 고백을 실패로 끝난 고백으로 덮어씌운 방법은 지금 생각해봐도 꽤나 괜찮았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다. 고백에 실패한다고 해서 혼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인간은 모두 혼자다. 그러니 나의 처지는 이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겠지. 나는 강 건너 불 구경하는 심정으로 주위에 떠도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우와, 도대체 무슨 깡으로? 주제도 모르나……. 에비나 불쌍해~.”
소문의 근원은 딱히 멀리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별로 없었고, 당사자였던 나와 토베, 에비나 양을 빼면 더욱 그랬다. 그 중에서 이 사건을 가볍게 잡담거리로 치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두 명 정도일 테지.
뭐, 원인을 추정했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차피 소문은 퍼진 거고 이제 와서 퍼진 소문을 되돌릴 방법은 없으니까.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고, F반에서의 내 존재감이라면 금방 사그라들겠지. 추가적인 추문이 생성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같은 이야기엔 금방 질려버리게 마련이다. 사가미 미나미 때처럼. 이거라고 다를 리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나 자신.
이어폰을 꽂고 공부에 집중하려 해도 교재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일에 관한 무관심하고 무자비하게 부풀려진 소문의 파편이 귀에 들려올 때마다 자꾸만 그 때의 광경을 떠올리고 만다. 유키노시타가 차갑게 분노를 쏟아냈던 일, 유이가하마가 서툴게 나를 나무랐던 일, 하야마가 조심스레 나를 동정했던 일, 에비나가 나를 온전히 공감했던 일, 그 모든 것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다.
입술을 깨물고선 힘을 줘서 샤프를 쥐었다.
“야야, 용기를 내는 건 어려운 거라고~. 멋있잖아~.”
토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런. 샤프심이 또 부러졌다. 새로 넣어야겠군. 약하기가 마치 내 멘탈 같다.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정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의외로 다시 봤달까.”
“의외로 가능성 있는 거 아니야?”
“아하하. 지금은 누구랑도 사귈 생각 없는걸? 친구잖아.”
에비나와 토베의 대화가 가슴을 찔렀다. 두 사람 다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변호하고 싶어 한다는 것만은 잘 알겠다. 어느 정도는 나에게 감사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런 동정은 받아봤자 이쪽이 비참할 뿐이니 그만둬 주면 좋겠다. 슬슬 한계가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이어폰은 꽂아둔 채다.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흉내를 내며 슬쩍 교실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계획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뒷문으로 향했다. F반 학생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진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채 교실 밖으로 나서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남자의 말이 들렸다.
“아, 잠깐 나갔다 올게. 금방 올 거야.”
무심코 발걸음을 멈출 뻔 했다. 간신히 태연을 가장해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교실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최근 들어 비기 존재감 죽이기가 전혀 기능하고 있질 않다.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히키가야!”
소리치지 말라고. 눈에 띄잖아.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고선 걸음을 빠르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 저 녀석과 말을 섞고 싶지 않다. 내가 무슨 사고를 벌일지 모르겠으니까.
“히키가야!”
누군가 억센 손으로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몸을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냈다. 내 AT필드를 뚫다니, 롱기누스의 트라이던트 태클인가. 무섭다고.
“잠깐 얘기 좀 하자.”
눈앞에 있는 남자는 손을 맞은 것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언제나처럼 상쾌한 미소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그 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자세히 보려던 건 아니고 단지 시선을 피하다 우연히 봤을 뿐이지만. 여튼 그걸 보니 거절할 핑계가 묘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야마는 싱긋 웃으며 내 앞으로 나섰다. 따라오라는 뜻인가. 나는 네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하야마를 따라 걸었다.
복도를 걸어 중앙 계단에 도착했다. 하야마는 망설이지 않고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카와……사키가 있던, 사가미가 있던 그 옥상을 향해.
문화제 당시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비품은 이제 없다. 더 이상 아무것도 길을 막고 있지 않다. 나와 하야마는 아무런 방해 없이 옥상 문 앞에 이르렀다. 하야마는 손을 뻗어 고장난 자물쇠를 쥐었다. 세게 잡아당기자 턱 하고 잠금이 풀렸다. 아직도 안 고쳤냐고.
물론 학교로서는 힘든 일이었겠지. 무언가를 고치려면 그것이 고장 나 있다는 사실부터를 알아야 한다. 인간도 사물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야마가 문을 열었다. 녹이 슬어있는 문은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확 들이쳤다. 나와 하야마는 옥상으로 나갔다. 가을, 문화제의 말미에 서로 서 있었던 포지션 그대로.
“사가미가 있던 자리군.”
하야마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펜스를 잡았다. 차갑지도 않은가. 하지만 하야마의 표정에 냉기를 억지로 참는 듯한 기색은 없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추우니 짧게 해 줘.”
하야마가 펜스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몸을 돌려 등을 기댔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여전했다.
“짧게라. 하긴, 우리가 길게 얘기할 사이는 아니지.”
하야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펜스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앗차,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인줄 알았네. 그것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 긴장을 고조하는 소리, 적들에게 죽음을 고하는 최후의 음악, 킹 엔진이다.
“히키가야. 너, 힘드냐?”
“뭐가?”
“학교가.”
실소가 새어나왔다. 역시 하야마라고 해야 할까. 진지한 눈으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신비에 가깝다.
“글쎄. 딱히 그렇진 않은데. 어차피 1년만 더 버티면 고등학교도 끝이고.”
“그 말은…….”
내뱉는 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하지만 하야마가 내뱉은 말은 흩어지지 않고 정확하게 나에게 도달했다.
“힘들단 뜻이로군.”
그딴 식으로 나를 보지 말라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내가 힘들어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하야마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내가 힘들어한다고 해도, 하야마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이렇게 넌지시 나를 떠보는 행위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웃기지 마. 하야마,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설마 내가 힘들어하니까 날 도와주겠다는 헛소리만큼은 아니길 빌겠어. 나는 네 도움만은 죽어도 받고 싶지 않아. 네가 그랬던 것처럼.”
하야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 같다. 뭐가 찔렸는지 나는 서둘러 변명을 더했다.
“네 말이 맞아. 너랑 나는 어떻게 해도 친하게 지낼 수 없어. 그러니 제발 신경 꺼라.”
이 정도가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자존심의 전부일 것이다. 내 말을 듣기만 하던 하야마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럼 넌 대체 왜……그 때 날 도와준 거지?”
“착각하지 마, 하야마. 나는 너를 도와준 적이 없어. 그냥 네 이기심을 믿지 않았을 뿐이지.”
하야마와 미우라의 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에비나의 마음에 공감해 버렸으니까.
그것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그냥 그렇게 됐을 뿐인 이야기다. 누가 누구를 도와주었다느니 하는 인간관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뱀에게 발을 무수히 많이 달아주면 지네가 될 뿐이겠지. 그건 결국 본질이 아니다.
“그래?”
하야마는 대답했다. 지난 수학여행 때 깃들어 있던 고뇌와 초조함을 모조리 털어낸 듯한 어조로. 다만 그 빈 공간에는 체념과 포기의 기색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나는.”
하야마가 차가운 눈으로 날 응시한다. 지지않고 맞섰다. 질까보냐. 그런 나를 바라보며 하야마는 선언했다.
“네 거짓말을 믿지 않겠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간만에 부실에 가니 콘센트가 꽂혀있는 전기 포트의 램프가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앞에 놓여진 책상 위에는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티 포트와 찻잔이 하나. 유키노시타는 그 바로 앞에서 흘러내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조용히 독서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름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유키노시타는 그보다도 빨랐던 모양이다. 게임을 하면 왠지 이도류 스킬을 쓸 것만 같다. 스타버스트 스트림이다.
유키노시타는 잠시 내 쪽을 힐긋 바라보더니, 고개를 까닥하며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안녕.”
“머뭇거리지 말고 앉지 그러니?”
수학여행에서 나를 향해 증오를 쏟아내던 유키노시타의 모습이 계속 뇌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실에 오기 전까지도 걱정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고. 그 이후로 유키노시타와 제대로 얼굴을 맞대본 적이 없었으니, 화가 가라앉지 않았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건 모두에게 거북한 일 아닐까. 그러니 그럴 낌새가 있으면 재빠르게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조금 안도하며 의자를 끌어와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열고 미리 가져온 책을 꺼냈다. 새로운 시리즈가 과연 어떨지 두근두근했다. 맨 앞의 작가 소개를 주의깊게 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탁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응?”
앞을 보니 유키노시타가 홍차를 따른 종이컵을 내 앞에 놓아주고 있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향긋한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좀 더 달콤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감상이지만. 유키노시타는 뭐라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홍차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조금씩 홀짝거렸다. 나에게 차를 따라준 유키노시타는 자기 자리로 돌아간 후에는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사가미가 본받아야 할 태도다. 무시는 저렇게 하는 거라고. 10점 만점에 8점 드리겠습니다.
인간 무시 선수권 대회의 합중국 일본 국가 대표로 유키노시타를 임명하고 있을 때, 마지막 부원 유이가하마가 봉사부실에 들어섰다.
“야헬롱! 아, 힛키두 먼저 와 있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짐을 챙겨 교실에서 빠져나온다. 내가 유이가하마보다 빠른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오히려 나보다 빠른 사람이 명백히 이상하다. 저기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Y양 같은 존재 말이다. 도대체 얼마나 일찍 교실에서 나온 거냐고.
유이가하마와 인사를 나눈 유키노시타는 읽고 있던 책 귀퉁이를 접어놓았다. 그리고 책을 덮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이걸로 부원이 다 모였구나.”
“그러니까, 움, 오늘은 중대한 발표가 있다구 했지?”
“그래. 앞으로의 봉사부 활동에 관한 발표야. 이미 히라츠카 선생님과도 얘기를 끝내 뒀어.”
역시 유키노시타로군. 빈틈이 없다. 갑자기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뭐냐고, 무섭다고. 특히 저 차가운 눈빛이 무섭다.
유키노시타는 나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선언했다.
“앞으로, 히키가야는 봉사부 활동에 나서지 말아줬으면 해.”
“엉?”
“히키가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좋아. 당분간은 나와 유이가하마가 움직이겠어.”
그렇게 말하며 유키노시타는 유이가하마를 돌아보았다. 유이가하마는 멋쩍은 듯 웃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둘 사이에도 이미 얘기가 끝나 있었나. 그럼 어차피 내 의견을 낸다 한들 받아들여질 여지는 없을 터였다.
제안을 수용할 때의 단점이라고 해 봐야 히라츠카 선생님이 억지로 부여한 내기의 패자가 될 뿐이다. 유키노시타가 줄 벌칙이라고 해 봐야 한두 번 흑역사 만드는 수준을 넘기기 어렵겠지. 그 쪽 방면은 전문가다. 결국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
“……의외로 순순하구나.”
“순순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니 나로선 환영이다.”
일하지 않는 미래. 그것이야말로 이상향인 것이다. 잠시 동안 내 눈을 들여다보던 유키노시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지금까지는 왜…….”
유키노시타가 그렇게 대꾸했다. 옆의 유이가하마도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억울한 건 나라고. 나는 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 그럼 나 혹시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 않…….”
“그건 안 돼. 나서지만 말라는 것뿐이니까. 옆에서 얌전히 활동 내역을 보고 있도록 하렴.”
칼같군요, 유키노시타 씨.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나고 있다. 기어스라도 나올 것 같다. 저기에 거부했다간 나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후대의 한 만화가가 내 이야기를 만화화해서 대 히트를 치겠지. 제목은 오렌지 로드.
“유이가하마. 히키가야가 구경꾼으로 전락한 만큼 네가 힘내줘야겠어.”
“응! 나한테 맡겨!”
“정말 신뢰가 가질 않는구나…….”
유키노시타는 고개를 내저으며 덮어뒀던 책을 다시 펼쳤다. 유이가하마는 그런 유키노시타를 보며 배시시 웃더니 옆에 가 앉은 후에 핸드폰을 열었다. 완벽하게 평소의 봉사부로군. 나 역시 아까 꺼냈던 책을 펼쳤다.
가끔씩 사이좋게 붙어 있는 두 사람을 곁눈질하며 나는 책을 읽어나갔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홍차가 담긴 잔들이 달그락대는 소리, 유이가하마의 핸드폰이 딸각거리는 소리, 책 페이지가 스륵하며 넘어가는 소리들뿐이다.
평소라면 유키노시타에게 재잘거렸을 유이가하마도 아무런 말없이 핸드폰만 두드리고 있었다. 그 침묵이, 대화가 없는 모습이 강하게 웅변하고 있다. 이 두 소녀가 나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을. 수학여행에서의 내 행동에 크게 실망했다는 것을.
봉사부 활동 정지도 그런 맥락이겠지. 이해는 간다. 나는 그 때 에비나의 의뢰를 받아들여 토베의 의뢰를 완전히 박살을 냈다. 봉사부가 받았던 의뢰는 엄연히 토베의 것이 먼저였지만 말이다. 지금도 토베에게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 얄팍한 인간이 해냈던 무거운 각오를 쓸모없게 해버린 것은 나니까.
그렇게 아무런 대화 없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차분히 독서에 집중하며 한 권의 책을 거의 다 읽어냈을 무렵 옆에서 먼저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의뢰가 없으니 슬슬 오늘의 부활동을 끝내자는 신호겠지. 나는 책갈피를 꺼내 책 사이에 꽂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가 봉사부의 문을 두드렸다.
일단 부실에 난입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금발 롤빵. 썩은 안경. 둘 다 여자. 이 이상 정확한 표현은 존재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키노시타가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니?”
“다들 헬로헬로~. 유미코가 부탁이 있다고 해서, 내가 끌고 와 버렸지!”
미우라는 거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에비나의 뒤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키노시타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부탁……?”
“하? 나도 너한테 부탁할 건 아무것도 없거든? 오히려 부탁할 건 유이니까!”
진심으로 소름끼친다는 듯 미우라는 유키노시타를 향해 혐오가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올 한 해 미우라가 유키노시타에게 깨져나간 적이 몇 번 되지만 미우라의 태도에서 약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과연 여왕이라고 해야 하나.
유키노시타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물었다.
“그럼 그건 F반에 관계된 문제라고 생각해도 되겠니?”
“……그래.”
속내를 읽혔다는 게 불쾌한 듯 미우라는 고개를 홱 돌렸다. 길게 늘어뜨린 탐스러운 금발이 그에 따라 찰랑거렸다. 유이가하마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에엑? 우리 반?”
“아하하. 요새 우리 반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
“아아, 그거구나…….”
유이가하마가 내 쪽을 힐긋 바라봤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허둥지둥 고개를 돌렸다. 야, 나도 알고 있거든. 믿기 힘들겠지만 나도 F반이라고. 이제 와서 무슨.
그런 분위기에서 대충 문제를 짐작한 것인지 유키노시타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유키노시타를 바라보며 미우라는 미우라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재 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 험담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다고나 할까. 물론 난 험담하는 거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뒤에서 단체로 떠들어대는 건 좀 별로거든? 그게 기분 나빠.”
“그런 분위기를 개선해 달라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되겠니?”
“그래.”
“좋아. 네 어리광은 잘 알아들었어.”
“하아? 싸움 거는 거야?”
미우라가 죽일듯한 시선으로 유키노시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 역시 유키노시타의 요약을 반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게 어리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지금껏 방관해 온 주제에 이제 와서 험담을 해결하겠다? 웃기는 소리다. 나는 근본적인 이유를 알고 있다. 미우라 유미코에겐 그런 교실의 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여기로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전 인류를 뒤져봐도 없다.
게다가 유키노시타라니. 다른 건 몰라도 유키노시타의 인심 장악술은 대단히 형편없다. 전투력으로 따지면 닿기만 해도 죽는 게임 캐릭터가 떠오를 정도다. 그런 유키노시타에게 반의 분위기를 해결해 달라는 의뢰는 불가능이나 다름없다.
미우라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키노시타는 고개를 쳐든 채 도도하게 버티고 서 있다. 봉사부실은 서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둘 덕분에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되었다. 예로부터 소녀의 싸움은 금발 vs 흑발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 둘은 결코 섞일 수 없는 속성이니까 말이야.
사이에서 유이가하마가 애쓰며 중재하려 하지만 둘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서로만 노려보고 있다. 에비나는 애초에 좀 거리를 두고 떨어진 곳에서 속내를 읽기 힘든 귀여운 미소만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말리는 게 좋겠지. 나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미우라.”
“……? 뭐야, 히키오.”
“그냥 조금만 참으면 어때? 어차피 학년이 올라가면 다시 뿔뿔이 흩어질 반이야. 그렇게 되면 금방 없어지겠지.”
결국 상식적인 해결책은 지금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의 붕괴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다행히도 고등학교 반이라는 것은 매 년 붕괴하게 된다. 처음부터 어설픈 유통기한을 지닌 집단이라고 할까. 하지만 내 상식적인 답변에 돌아온 것은 거센 비난의 물결이었다.
“힛키……진짜루 너무해…….”
“히키가야. 의뢰에는 나서지 말라고 했던 말을 벌써 까먹은 거니? 정말이지 얼마나 반복적으로 말해줘야 그 회색 뇌세포에 기억이 박히는 걸까, 인류의 신비나 마찬가지인걸.”
“히키오. 이게 애초에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문화제 때부터 쉴 새 없이 네가 사고를 치니까 그렇잖아!
눈을 내리깔고 있는 유이가하마, 분노를 한껏 내뿜고 있는 유키노시타, 어이없다는 듯한 미우라까지. 아, 네……. 제가 잘못했군요. 그런 거군요.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모습을 확인한 유키노시타는 고개를 돌려 미우라에게 물었다.
“그런데 히키가야가 사고를 치다니?”
“몰라서 물어? 문화제 때 사가미랑 싸운 것도, 수학여행에서 에비나한테 고백한 것도 다 쟤잖아.”
“그건…….”
유키노시타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뭐, 미우라의 말에 틀린 점이 없으니까.
“아! 그, 그럼 힛키 이미지만 좀 나아지면 반 분위기도 괜찮아지지 않을까!?”
유이가하마가 대단한 아이디어를 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게 말이나 되냐. 어이없어 하는 나와는 다르게 유키노시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네.”
“아니 없을 것 같은데…….”
“히키가야. 의뢰에 간섭하지 말라는 말을 도대체 몇 번 하게 만들 거니? 경고는 여기까지야.”
차가운 시선이 무섭다. 저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수준. 사이클롭스냐고. 눈에서 빔이 나오는 것 같잖아. 이미 나의 발언권은 없는 것 같으니 얌전히 있도록 하자.
그나저나 지금까지는 경고였나. 이 다음은 대체 뭘까……. 함정이라는 걸 너무 뻔히 알게 되면 오히려 밟아보고 싶어지잖아.
“히, 힛키의 이미지 개선이라…….”
“정말 난제구나.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너흰 봉사부라며? 어떻게든 해 보라고.”
“그럼 일단 힛키의 장점을 말해보자!”
토베와 상담했던 때와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그리고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아니, 누가 말 좀 해줘. 아무리 나라도 장점은 있잖아. 음.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라거나.
“이, 일단은 유미코부터!”
“하? 나, 나? 음……. 굉장히 자세히 보면 일단 생긴 건 봐줄만 하네.”
후, 리얼충들에게마저 통하는 나의 외모가 두렵다……. 하지만 미우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썩었어.”
“정말 그 말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구나.”
구제의 여지가 없다는 듯 단언하는 미우라의 말에 곧바로 유키노시타가 동의했다. 너희 둘, 서로 싫어하는 거 아니었냐. 왜 이리 순식간에 단합하는 거야.
“우움, 구, 국어 성적이 좋다?”
“사람의 말을 부정하는 면은 누구와도 비할 바 없이 탁월하다고 생각해.”
“그 때 테니스를 쫌 그럭저럭 하지 않았어?”
“코, 코마치랑두 사이 좋지!”
세 명의 소녀들은 한 명씩 번갈아가며 나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곧 부실은 침묵에 휩사였다. 끝이냐. 벌써 끝이냐고. 유키노시타가 암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모아봐도 이미지 개선에는 하등 무의미할 것 같구나. 아니, 애초에 모을 게 없어.”
“야! 있긴 있잖아! 공부를……그럭저럭 한다거나! 운동을……그럭저럭 한다거나! 얼굴이……그럭저럭 괜찮다거나!”
자기들이 말해놓고도 아무도 내 말에 동의해주지 않았다. 이것이 군중속의 고독인가. 그 때 뒤에서 아무런 의견 없이 가만히 서 있던 에비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을 꺼냈다.
“흠. 내 생각인데, 희미한 히키타니의 장점을 찾으려고 해봤자 소용없지 않을까?”
“희미한……정확한 평가로구나. 장점처럼 보이는 게 있긴 있지만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 정말 정확해.”
“너는 대체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 거냐…….”
여린 내 마음이 상처입는다고. 유키노시타가 차갑게 대꾸했다.
“오해하지 마. 그냥 진실을 말해줬을 뿐이니까.”
“아하, 아하하! 그, 그래서 히나는 다른 생각이라도 있어?”
나를 감싸려는 듯 유이가하마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에비나의 안경이 번쩍 하고 빛을 반사했다.
“애초에 히키타니에 관한 험담이 유행하는 건 히키타니 개인과는 별 상관없으니까. 개인의 개선을 요구해봤자 의미가 없을 거라고 봐.”
“그럼?”
“원인을 약화시키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지금의 사태가 일어나게 된 원인 말이야.”
“원인이라. 타당한 접근법이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결국 지금 소문의 원인이 된 건 나한테 고백해서 차였다는 것 때문이니까. 그걸 약화시키면 어떨까?”
에비나가 묘한 미소를 매단 채 나에게 다가왔다. 새빨간 안경테가 묘하게 유혹적이었다. 에비나는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꼭 붙잡은 채,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히키타니. 나랑 데이트할래?”
그리하여, 에비나 양과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헛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다만 나는 에비나 양이 그런 제안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에비나 양과 나는 서로 닮았으니까. 이런 어설픈 놀이에 동참할 수 있는 심성이 없다.
하지만 에비나 양은 불시에 그런 기습을 던져 왔고 내가 할 말을 잃은 채 어버버거리고 있을 때는 이미 다른 세 명의 소녀를 대강 설득해 모든 일을 파죽지세로 진행시켜 버렸다. 유키노시타랑 유이가하마는 별로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에비나의 수완은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곳 까지 와 있었다고.
에비나가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혹시 그건가. 약속 장소에 나가보면 에비나 양이 아니라 다른 남자가 서 있는 거야. 그리고 에비나 양은 카메라를 들고 옆에서 흥분하고 있는 거지. 이거라면 모든 사항은 납득이 된다. 토츠카가 아니면 바로 도망쳐야겠다. 흠, 그렇게 하자.
약속 장소는 카이힌 마쿠하리 역. 시간은 방과 후. 어차피 교실에 남아있을 생각은 없었으니 재빠르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코마치에게 오늘은 늦게 들어간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안녕, 히키타니?”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시선을 돌리자 에비나 히나가 서 있었다. 한 손엔 가방을 들고, 나머지 한 손을 나를 향해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왔네.”
“뭐, 지체할 이유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에비나 양은 나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댔다. 가까이서 보니 그 미모가 실감이 된다. 미우라 유미코가 자신의 그룹원으로 발탁한 것이 전혀 의심스럽지 않다고 해야 할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왜 이런 제안을 한 거야?”
“글쎄? 하지만 말이야. 지금은 데이트 중이라고.”
에비나가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나는 기겁하며 몸을 뺐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에비나 양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히키타니, 겁쟁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단은 놀자. 뭐 좋아하는 거 있어?”
“글쎄다. 딱히 취미랄 게 없어서.”
두 번 다시 취미가 인간 관찰이라고 말하지 않으리. 그 때 혹독하게 받았던 비난만으로 충분하다.
“역시랄까, 담담하게 사네, 히키타니는. 그런 점은 나랑은 다르구나.”
“비슷한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만…….”
“뭐, 사고방식만은 비슷하잖아.”
그럴지도. 딱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럼 오늘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게. 미우라는 별로 좋아하질 않으니까, 자주 갈 기회가 없거든.”
에비나는 그렇게 말하며 역 안의 게임센터를 가리켰다.
이 여자, 게임 진짜 잘 하네. 별명을 붙여줘야겠다. 높은 점수를 내는 여자……하이스코어 걸이면 적당할 것 같다.
격투 게임은 시작하자마자 아무것도 못해보고 퍼펙트로 졌다. Heaven or Hell이라니, 그냥 Hell이잖아. 그럭저럭 게임만은 잘 하는 편인 자이모쿠자한테도 진 적이 없는데……. 오해가 있을까 싶어 첨언하자면 자이모쿠자와 게임을 같이 한 적이 없으니까, 진 적도 없다. 에비나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히키타니, 너무 약해~” 하더니 파죽지세로 CPU 보스를 쳐부숴버렸다.
리듬 게임은 9개의 버튼을 쓰는 두더지 잡기 게임 같은 거 앞에 서더니 카드를 꺼내서 댔다. 확실히 요새는 플레이 데이터를 저장해야 하는 아케이드 게임이 많아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에비나의 플레이를 구경했다. 손이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
슈팅 게임은 잘도 탄 옆에 붙어서 8배나 되는 보너스를 획득하고 있다. 게다가 간간히 다른 동료가 튀어나와서 지원을 하고 있다. 시스템의 근본이 뭐냐고…….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동료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현실을 나타내는 건가. 무섭잖아.
그 후로도 에비나는 게임 센터 전체를 들쑤시고 돌아다녔다. 그리고선 간간히 내 쪽을 살피듯 고개를 돌린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농구대를 향해 공을 던지고 있는 에비나를 바라보았다.
깔끔한 폼이군. 정말이지 여러모로 다재다능한 여자라고 할까. 유키노시타 자매가 뭐든지 화려하게 해치운다는 쪽이면 에비나는 뭐든지 능숙하게 처리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앞에 있는 전광판에는 현재의 점수와 게임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시간은 좀 남았군. 살짝 지루함을 느낀 나는 오락실 안을 둘러보았다. 문득 스티커 사진기가 눈에 들어왔다. 카운터까지 따로 설치되어 있어서 남자의 출입을 차단하는 커플의 성지가. 이것만 보면 토츠카와의 추억이 생각나는군.
“얏호! 하이 스코어!”
게임이 끝났는지 옆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에비나가 눈에 들어왔다. 꽤나 열중해서 농구공을 던져댄 건지 얼굴에 약간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에비나가 씨익 웃으며 내 팔을 붙잡았다.
“히키타니. 사진기 보고 있었지?”
“어? 어.”
“뭐야, 저거 찍고 싶었어? 미리 말을 하지~. 혼자만 노는 것 같아서 미안했단 말이야.”
“아니, 찍고 싶지 않은데.”
“부끄러워하기는. 자, 가자!”
에비나가 내 팔을 질질 끌며 스티커 사진기로 향했다. 그 때 자이모쿠자를 거칠게 막아섰던 카운터의 점원도 그냥 부드러운 미소만 띤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좀 말리라고…….
에비나는 스티커 사진기는 매우 익숙한 듯 주위의 클론스러운 모델들의 사진이 박혀 있는 기기들을 죽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러다 중간에 있는 한 기기로 날 잡아끌었다. 토츠카랑 찍었던 심령사진기와는 다른 기기군. 그 기기는 좋지 않은 유령이 나타난 기억이 있으니 다행인 편이라고 할까.
동전을 집어넣자 배경을 고르는 화면이 나왔다. 에비나는 잠시 손가락을 입에 댄 채 고민하더니 개중에서 그나마 덜 큐트적이고 덜 뷰티적으로 보이는 배경을 골랐다.
“이제 곧 플래쉬 터져.”
그렇게 말하며 에비나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여 내 어깨 끝에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느낌이 옷 위로 전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플로랄한 샴푸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내가 당황해서 몸이 굳어있을 때, 에비나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며 브이자를 그렸다.
기계가 태양권을 썼다. 그나마 두 번째라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익숙한 자세로 얼굴을 찌푸린 채 연신 터지는 플래쉬 세례를 받아내었다. 이런 고문을 받는데 돈을 내야 한다니,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밖으로 나가서 예쁘게 꾸미라는 헛소리가 나오고, 나와 에비나 양은 옆의 부스로 이동했다. 에비나가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히키타니, 뭐 쓸래? 애인 사이라고 적을까?”
“헛소리 말고 진실을 써라. 아는 사이겠지, 우리는.”
에비나는 킥킥대며 내 주문대로 아는 사이라는 글자를 써 넣었다. 그걸로 끝. 활짝 웃고 있는 에비나와 어색한 내가 같이 찍혀 있는 사진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에비나는 솜씨 좋게 사진을 반으로 갈라서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자.”
확실하게 아는 사이라고 적혀 있군. 완연한 미소녀인 에비나와는 다르게 이번에도 내 모습은 무서울 지경이다. 뭐지 이 새하얀 생물체는…….
“아, 잘 놀았다.”
에비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욱 기지개를 켰다. 남자 앞에서 그런 행동 좀 하지 말라고 가슴이 강조되어 버리니까 시선을 둘 데가 없어서 곤란하다. 게다가 어설픈 놈들은 지멋대로 착각까지 한다. 헉, 얘 혹시 날 좋아하나? 미리 알려드립니다만은, 걔는 널 좋아하지 않으니까 지금 당장 집에 들어가서 혼자 게임이나 하세요. 플레이타임이 긴 RPG 계열이 나의 추천이다. 파란 바퀴벌레 머리의 마왕 이야기라도 하면 좋겠지.
“이제 슬슬 한 바퀴 다 돈 거 아닌가? 뭐라도 마셨으면 좋겠는데.”
“그럴까? 히키타니, 커피 좋아해?”
상상 속의 에비나에게 플래티넘 트로피를 안겨준 후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나쁘지 않지. MAX 커피면 더욱 좋다.
나와 에비나는 미묘하게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쉴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카페에 들어갔다.
적당히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주문을 했다. 패스트푸드로 착각할 정도로 빠르게 커피가 나왔다. 그 인스턴트함에 감탄하며 한 입 맛을 보니 너무 썼다. 테이블 위에 있는 설탕과 프림을 뒤적거리고 있는 나에게 에비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은 어울려줘서 고마워.”
“아니, 뭐 별로……. 사실상 게임을 하며 놀았을 뿐이고.”
게임을 한 건 나쁘지 않지만 효용성만은 의심이 든다. 나와 에비나가 친근하게 지내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볼 지부터가 의문이지만, 어쨌든 본다고 치자. 그래서 무언가 달라질까? 글쎄, 절대 아니라고 본다. 에비나의 평가가 내려갔으면 내려갔지 내 평가가 올라갈 일은 없다. 불꽃축제 때 유이가하마를 바라보던 사가미 그룹처럼.
“하하하. 히키타니 생각 알 것 같아. 분명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이 여자 앞에서는 숨길 필요도 없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수의 여론이라는 건 단단하지 않고 물렁해 보이지. 하지만 질척거린달까……어지간한 방법으로서는 빠져나올 수가 없어.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이나, 혼자서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알면서 이런 헛짓을 한 이유는 뭐냐?”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어조로 대꾸하고 말았다. 나무가 되어 에너지를 절약하며 살고 싶은 나의 심정도 좀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에비나는 내 말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대답했다.
“유키노시타나 유이가하마의 방해 없이 둘만 있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했거든.”
에비나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뭔가 크게 달라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왜?”
“히키타니가 이렇게 해결해 줄 거라곤 생각 못 했으니까.”
해결이라는 건 역시 수학여행 때의 일인가. 나는 잠자코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마구 들이 붓기 시작했다. 씁쓸한 맛은 싫지.
“하야토하고 히키타니한테 부탁을 해 두면, 어떻게든 토벳치를 설득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너희 둘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너희 둘이 함께 움직인다면 못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야마와 함께……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본다만.”
이 여자는 아직도 HxH에 집착하는 건가. 차마 약어가 아닌 다른 단어로 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 소름 돋는다고. 에비나는 부정의 의미가 가득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다만 내 생각보다 하야토의 트라우마는 강했고, 그 누구도 상처 입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았어. 마지막에 불려 나가면서, 대나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대나무 숲, 옅은 미소를 띄운 채 걸어오는 에비나, 긴장된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는 토베, 고개를 돌린 하야마, 즐겁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는 관중들……. 그 날의 이미지라면 나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당사자인 에비나야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다보니 히키타니가 토벳치의 고백을 가로챘을 때도 알아차리는 게 늦었어. 그런 식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는걸. 돌아올 때까지는 그냥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고, 고맙다는 생각뿐이었지만. 그 다음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그 뒤에 퍼진 소문 때문인가.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에비나는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처음에 소문 퍼지는 걸 최대한 막으려고 했는데, 무리였어. 남자애들 쪽에서 이야기가 도는 건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었고.”
“하아. 네가 소문을 낸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는 없어. 어차피 조금만 버티면 모든 게 끝이야.”
잘못한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줄도 모른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선량한 마음을 지니면 지닐수록 더욱 고통 받게 된다. 이 구조는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태연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적응을 끝낸 사람들이겠지. 이상한 환경에 적응을 끝낸 사람이라면 분명 모두 이상할 것이다. 즉, 리얼충은 모두 이상한 존재다.
그러니 에비나가 나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게다가 나는 악의를 견뎌내는 것만은 익숙하다. 백전 연마의 병사다.
“나는 히키타니의 말에 공감해. 그냥 2학년이 끝나가길 기다리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일 거라고. 나도 그 이외의 방법은 생각해 낼 수가 없었으니까.”
에비나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렌즈 너머로 보이는 생기 없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아? 3학년이 되면 정말 모든 게 사라질까? 지금보단 나을지는 몰라도 모든 게 없어지진 않을 거야.”
알고 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완전한 리셋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금껏 쌓아온 평가가, 행동이, 그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고 앙금이 되어 남는다는 것을. 높은 밀도를 지닌 침전물은 아무리 씻어내려 해도 소용없다. 그것을 통째로 버리지 않는 한은.
에비나가 나를 향해 묻는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추궁에 가까운 문장을.
“정말로, 버틸 수 있어?”
코웃음을 치며 당연하다고 말할 심산이었다. 이 흐름은 처음에 에비나가 수학여행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예측했던 바다. 그 일이 아니라면 나와 엮일 일 자체가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대답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그랬을 텐데.
포기와 체념이 가득한, 나와 닮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입이 도무지 열리질 않았다. 뻐끔거리는 나를 보며 에비나는 우울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히키타니, 요새 힘들어 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하야토도 몇 번 걱정스러워하는 말을 넌지시 꺼냈어. 유미코가 봉사부에 가게 된 것도 결국은 하야토의 생각 때문 아닐까? 하야토가 걱정하는 문제를 같이 걱정해주는 나에게 감탄해! 같은 식으로.”
과연, 그런 인과 관계였나. 모든 것이 납득이 된다. 정말이지 귀찮은 녀석이다. 그냥 서로 내버려두고 살아가면 좋을 텐데. 다른 세계에서, 다른 생활을, 다른 방식으로.
“적어도 불평이나 불만을 말이라도 하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
에비나가 주머니에서 아까 찍었던 스티커 사진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진을 조심스레 손으로 쓰다듬으며 에비나가 갑작스레 말을 돌렸다.
“히키타니. 블로그 같은 거 해본 적 있어?”
“……옛날에 잠깐.”
그 부분은 괴로운 기억이니까 잊고 싶다. 근데 잊고 싶다고 생각하는 기억은 계속 생각하게 되니까 더 기억에 남잖아. 진짜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편하게 구성되어 있는 거 아니냐고.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사람들 보면 사생활을 그런 데 막 써 놓잖아.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탁 털어놓지. 그런 걸 보면 의외로 모르는 사람한테는 자기 심정을 털어놓기 편한 법 아닐까?”
“그래서?”
자연스레 말투에 적의가 실렸다. 내 감정을 읽어낸 것인지 에비나는 가볍게 목을 움츠렸다. 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털어놓을 곳이 필요하다면, 내게 털어놔 줘. 내가 히키타니에게 있어 모르는 사람이 되어줄게.”
테이블 위에 펼쳐진 스티커 사진을 쓰다듬으며 에비나 양이 작게 중얼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되어 주겠다. 그건 인간관계를 진심으로 긍정할 수 없는 에비나가 내놓은 해결책인 거겠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적어도 불만을 토로하기나 하라고. 그래서 편해지라고.
무리다. 단순한 아는 사이. 나와 에비나 사이에 그 이상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딱 그런 관계다. 그러므로 모르는 사이가 될 수도 없겠지. 나는 감정을 억제하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에비나. 네 마음엔 고맙다고 대답해 둘게. 하지만 말이야. 필요 없어.”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그건 결국 패배다. 용의자가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반응한 순간 모든 여론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잘못은 지워지지 불변의 역사로 각인된다. 내가 잘못했건, 잘못하지 않았건 간에.
사과를 요구하던 동급생들의 모습이 뇌리를 침범했다. 나는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다.
“나는 외톨이 생활도 길었고, 무척이나 익숙해. 너에게 차인 소문이 퍼져서 F반의 분위기가 악화됐다? 아니, 전혀 아니야. 그건 어디까지나 계기일 뿐이지. 그 일이 없었으면 분명 뭔가 다른 껀수가 생겼을 거고, 그 결과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을 거야. 히키가야 하치만은 그런 인간이니까.”
“그게 아니…….”
“그러니 네가 나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무언가를 해 줄 필요도 없어.”
다급하게 반박하려 하는 에비나의 말을 끊었다. 아닐 리가 없다. 다를 리가 없다.
“정 네가 나에게 뭘 해주고 싶다면…….”
나는 계산서를 들어올렸다. 내가 주문한 커피 옆에 410엔이라는 가격이 박혀 있다. 제일 싼 커피를 시켰으니까. 이 정도면 크게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니겠지. 역시 이 돈이라면 그냥 MAX 커피를 두 캔 마시는 게 낫다는 생각은 들지만. 나는 계산서를 에비나 양을 향해 밀었다.
“커피 계산, 부탁한다. 그걸로 끝내자.”
에비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비나의 투명한 안경 렌즈 너머로 꾹 쥐고 있는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말없이 몸을 돌려 가게 밖으로 나갔다.
겨울의 밤은 빠르다.
뭘 한 것 같지도 않은데 해가 져 있다. 저 멀리 하늘에 푸르스름한 달이 떠 있었다.
친구란 관계는 희미하다. 만화 얘기만 해도 절교를 선언당할 정도다. 결국 나라는 인간의 가치가 그 정도뿐이라는 증거일 테지. 여태껏 자신의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확인해 온 나는 나에게 다가오는 호의를 인정하기 어렵다. 그것들은 모두 일시적이고 우연한 계기가 작용했을 결과일 뿐이다.
지나가는 개를 구해 주었다거나, 돈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스칼라십이라는 해결책을 알려 주었다거나, 쓰고 있는 가면을 꿰뚫어 보았다거나, 문화제에서 고생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거나, 변하려고 하는 관계를 고정시켜 줬다거나……가끔씩, 그러한 내 자기학대의 결과에 호의를 표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의미는 없다.
어차피 결론은 똑같으니까. 계기가 뭐가 됐든지 간에 나를, 히키가야 하치만을 알게 되면 될수록 그 호의는 멀어진다. 사라져 버린다. 여태까지 예외는 없었고, 나는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 원인이 고정되어 있다면 결과 역시 바뀔 이유가 없다.
그러니 나는 에비나 양과의 관계를 거부하겠다. 에비나는 나를 너무나 닮았다.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에비나 양이 스스로를 싫어한다면,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도 그렇게 되고 말겠지. 우리는 서로에게 희미한 호감을 품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서로를 혐오하게 될 것이다. 그건 둘 모두에게 비극이겠지. 나는 자진해서 그 주인공이 되고 싶은 생각 따위 없다.
나는 주머니에서 아까 찍었던 스티커 사진을 꺼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진을 들어 올려 저 먼 곳에서 떨어지는 달빛에 사진을 비췄다. 에비나 양의 자그마한 얼굴이 달빛을 받아 떠올랐다. 그 옆에는 눈이 썩어있는 남자가 하나, 그 사이에는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아는 사이’ 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새빨간 안경은 잘 어울린다. 에비나 나름의 포인트라고 할까, 귀엽고 오밀조밀한 인상과 대조되어 눈에 확 띈다. 언제나 생글생글, 귀엽게 웃고 있는 인상과 조화되어 예쁘다는 감탄이 나오게 만든다.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세찬 겨울의 밤이 내 손 끝에서 자그마한 스티커 사진을 빼앗아 갔다.
“아…….”
나는 잠시 놓쳐버린 스티커 사진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추위에 얼어붙은 손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손에 닿지 않은 스티커 사진은 바람에 날려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언제고 손이 닿지 않는 달처럼.
새하얗게 흩어지는 입김을 바라보며, 아까까지 내 손에 있었던 사진 속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했다. 귀엽게 웃고 있을 에비나 양의 얼굴을. 하지만 머리에 안개가 낀 것 마냥 제대로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을 텐데.
이유는 알고 있다. 가짜라서 그런 거겠지. 거기에 진심이 없으니 기억에 각인될 인상이 새겨지지 않는다. 나와 같이 나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뒤집어쓰는 두터운 갑옷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가면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가면이 없으면 한 시도 버틸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 가면에 집착한다. 끝이 없는 악순환.
나도 에비나 양도,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달을 향해 뻗고 있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를 악물고, 입술을 짓씹으며 나와 에비나에 대해 생각을 되새겼다.
결국 우리들의 모든 것은 어설픈 거짓.
그래서 에비나 히나는, 결코 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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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까지 내용을 기반으로 한 에비나 히나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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